인디인디안 눈에 비친 세상

최충헌

무신2012. 3. 12. 09:52

 

 

최충헌(崔忠獻1150<의종4>~1219<고종6>)- 고려 후기의 권신(權臣). 초명은 난(鸞), 시호는 경성

(景成), 우봉(牛溄)사람, 上將軍 원호(元浩)의 아들. 1174년(명종4)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할
 
때 용명(勇名)이 있어 별초도령(別抄都令)에 등용, 뒤에 섭장군(懾將軍)이 되었다. 1196년(명종

26) 아우 충수(忠粹)와 이지영(李至榮-이의민의 아들)과의 사감(私憾)이 동기가 되어 충수의 권유

로 먼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의민(李義旼)을 미타산(彌陀山)에 있는 그의 별장을 습격하여

죽인 뒤에 그 머리를 저자거리에 효수(梟首)케 하는 한편 군사를 모아 이의민의 아들 지순(至純) ․
 
지광(至光)이 거느린 가병(家兵)을 물리치고 명종을 움직여 이의민의 삼족(三族)과 그 일당을 모

조리 잡아 죽였다. 그의 숙청공작은 자못 철저하여 평장사(平章事) 권절평(權節平) ․ 손석(孫碩),
 
대장군(大將軍) 이경유(李景儒) 등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인성(李仁成), 上將軍 강제(康濟) 등

36명이 딴 뜻을 품고 있다하여 전후해서 모두 잡아 죽였고, 또 판위위사(判衛衛事) 최광원(崔光

遠) ․ 소경 권신(權信) ․ 장군 권식(權湜) ․ 두웅룡(杜雄龍)등을 귀양 보냈는데, 이들은 이의민의 일

파들이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그의 정적(政敵)을 제거한 뒤에 명종에게 10조목의 봉사(封事)를

올려 폐정(弊政)의 시정과 함께 임금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 봉사는 당시의 시폐(時弊)를 적절

히 나타낸 것으로서 그의 이런 정치적 식견은 정중부 ․ 이의방 ․ 이의민 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

었다. 그가 군웅(群雄)을 물리치고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장점을 지녔었기
 
때문이다.그는 정치적 기반을 굳게 한 뒤에 좌승선(左承宣)과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겸하게

되었으며, 이듬해인 1197년(명종27)에는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명

종은 원래 그가 세운 임금이 아니므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명종을 내몰고 평량공 민(平凉公

旼-명종의 母弟)을 세우니, 이가 곧 신종(神宗)이었다. 이에 그는 임금에게 말하여 명종 때의 近

臣들을 모두 내 쫒아 정권을 완전히 최씨(崔氏) 일가가 독차지 하게 되었다. 정국공신 삼한대광

대중대부 상장군 주국(靖國功臣三韓大匡大中大夫上將軍柱國)이 되었다. 충수가 그의 딸을 태자

(뒷날의 熙宗)의 비(妃)로 삼으려 임금에게 강요하고 태자의 본비(本妃)를 내보내므로 그는 이에
 
반대, 드디어 무력 충돌에까지 이르러 충수는 살해당하였다. 이는 신종이 옹립된 다음 달의 인인

데, 이로써 본래는 그의 아우 충수와 나누어 가졌던 군국(軍國)의 대권(大權)을 독점하기에 이르

렀다. 1198년(신종1)에 만적(萬積)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이 계획을 알고 만적 등 1

백여 명을 붙잡아 강에 던져 죽였다. 만적의 난 이후에도 가끔 그를 처치하려는 음모가 자주 발생

하자 경대승(慶大升)이 두었던 도방(都房)을 다시 설치하여 신변을 보호하였다. 그에 대한 살해음

모사건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교정도감(敎定都監)을 두고 혐의자를 색출하기도 하였는데, 이 도

감은 뒤에 최씨 일문이 무단정치를 함에 있어 한동안 일본의 바꾸후(幕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신종의 뒤를 이어 희종이 즉위하고는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어사대사(守太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御使臺事)로 삼았으며, 그를 신례(臣禮)로써 대하지 않고 은문

상국(恩門相國)이라 하였다. 얼마 뒤에 門下侍中 ․ 진강후(晋康侯)가 되었으며, 진강郡(지금의진

주)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희종이 그의 권세에 눌려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되자 내시(內侍)
 
왕준명(王濬明)이 중심이 되어 참지정사 우승경(于承慶) ․ 장군 왕익(王翊) 등과 같이 그를 꾀어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그는 희종과 태자를 폐하고 명종의 아들인 강종(康宗)을 맞아들

이고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文經武緯嚮里措安功臣)의 호를 받았다. 강종이 왕위에 있은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 진(瞋)을 세우니 이가 곧 고종(高宗)이었다. 그는 이와 가팅 일생중에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의 4임금을 왕위에 세우고 명종 ․ 희종의 2임금을 폐위시키는 등, 나라의 정치를 자

기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최씨 집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아들 이(怡<崔瑀>)가 정권을 이어받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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