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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난(武臣-亂)

무신2012. 3. 12. 09:47

 


 

무신의 난(武臣-亂)-고려 때 무신들에 의해 일어난 변란(變亂). 무신의 난은 좁은 의미로 정중부

의 난을 말하나 광의로는 고려 때 있은 무신의 난 전반에 걸쳐서 말한다. 무신의 난은 1170년(의

종24) 정중부에 의해 폭발되었으나, 실은 이보다 150년 전인 1014년(현종5) 최질(崔質) ․ 김훈(金

訓) 등에 의해 잠시 전주곡이 있었고 의종 ․ 명종 때 본격화하여 무인 집권시대가 시작되었다.

몽고의 침략 삼별초(三別抄)의 난으로 그 끝을 맺게 된다. 고려 태조는 무력으로 나라를 자지한

 만큼 태조 때는 文武의 차별이 없었으나 그 뒤 중국식의 여러 제도가 성립되고 과거제도를 채택

하여 文을 숭상하매 자연 武人을 얕보게 되었다. 더욱이 성종(成宗) 글안과 여진(女眞)의 침략에
 
대한 군사적 행동에 무신의 활동과 희생이 많았음에도 문관이 우위에 있어 군(軍)의 최고 지휘관

에도 문관이 임명되니 무인은 더욱 멸시를 받게 되었다. 또한 998년(목종1) 문무양반 전시과(田柴

科)의 개정 때는 무관의 품계(品階)를 낮추어 그들의 불평을 일으켰는데 1014년(현종5)에 급증(急

增)한 百官의 녹봉(綠峰)을 기급키 위해 당시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몰수 하였다. 이에
 
격분한 武臣 최질 ․ 김훈 등은 반기를 들고 관계자 황보유의(皇甫兪義) ․ 장연우(張延祐) 등을 귀

양 보내고 일시 정권을 잡았으나, 서경(西京) 장락궁(張樂宮) 연회 때 포살당하였다. 이후 역대 임

금은 숭문억무(崇文抑武)의 정책을 써서 무인을 둘렀다. 인종 때는 武學이 성하면 문신과 대립불

화의 우려가 있다하여 무학의 재(武學齋)까지 폐지하였다. 더욱이 묘청의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무인의 우대가 마치 역부(役夫)와 같이 되어 문신과 왕의 연회장에 시중하며 종일 굶주림에 시달

렸고, 심지어 어떤 무신의 처(妻)는 모발(毛髮)을 팔아 음식을 준비하는가 하면 경박한 문신 김돈

중(金敦中)이 그 아버지 김부식(金富軾)의 권세를 믿고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의 수염을 촛

불로 태우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경멸적인 대우는 보현원 행차 때 무신들의 쿠데타를 맞게 되었

다. 이후 정중부 ․ 이의방 ․ 경대승 ․ 이의민 등 무신의 군웅시대(群雄時代)를 거치고 최충헌(崔忠

獻)의 집권에 이르러 일단 난세는 걷히었으나, 몽고 침략 때 최씨 정권의 몰락으로 다시 김준(金

俊) ․ 임연(林衍)
등의 난동이 재연되기도 하였다.  →국사대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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