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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마도 +2

대마도2

일본/대마도2012. 3. 23. 17:42

2월 19일 아침 대마호텔에서 바라본 이즈하라 시내의 모습



호텔 로비에 대단히 큰 피난유도등



배연창-화재가 발생했을 때 연기를 배출하는 창문이다


피난사다리-일본은 재난에 대해선 어느나라 못지 않게 잘 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대마호텔의 화재시 피난기구이다)



피난사다리 사용법



이즈하라 시내의 조용한 아침



해적선의 은익지-오후나에



 오후나에는 공원으로 잘 만들어져 있고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산책한다고 한다

연인들도 많이 오지만 특히 홀아비와 과부들이 이곳을 찾아와 서로 마음을 통한다고 한다


 

 


히타카츠에서 출발할 때는 빨간색으로 표시된 도로를 따라 이즈하라로 왔고


이즈하라에서 히타카츠로 갈 때는 아래 파란색 도로를 따라 가면서 대마도 모습을 보았다


카미사카 공원 안내도


 


카미사카공원에서 바라본 대미도 리아스식 해안의 모습




만관교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대마도는 1900년경에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해 섬은 상대마, 하대마로


나뉘게 된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이 운하를 일본 해군의 전략적 거점으로 십분 활용 

하여 당시 해군 전력상 세계최고로 꼽히던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쓰시마로 유도시켜 이 발틱함대 

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된다

 


대단히 큰 은행나무가 눈에 띈다 

 


히타카츠에 도착 점심(우동과 초밥)을 먹고...... 

 



미우다 해수욕장




한국전망대


 


아무것도 안 보인다....바다만 보인다....



그래서 전망대에 관광객을 위해 설치해 놓은 사진과 모형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오기로 하고 히타카츠항을 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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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직선거리로 49.5km이고 쾌속선으로 1시간10분 거리에 있다.

2012. 2. 18. 부산에서 비틀을 타고 히타카츠항에 도착 - 이즈하라까지 가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히다카츠로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우리가 타고 갈 코비(일본선적-작년 일본 동북지역 지진이후 한국방문객 유치를 위해 취항했다고 한다)쾌속선




 입국수속을 마치고 식당으로 이동 점심(우동,김밥,회,단무지)을 먹고....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바라본 쓰시마의 모습(일본판 하롱베이라고 한다)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토요타미쵸 관광안내판(와타즈미 신사가 있는 곳이다)



와타즈미 신사-원시림이 우거진 큰 숲을 이루고 있어 여름에 오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와타즈미 신사는 天神인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와 海神인 토요타마히메노미코토를 기리는 해궁으로 바다神 신사중

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신사로 예로부터 용궁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본전 정면의 5개의 문 중 2개는 바다속에 세워져 있고 밀물과 설물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여 먼 옛날 신화시대를 연

상할 수 있는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고 하는데......



막부사자 상사 - 조선통신사막부접우노지 라고 쓰여져 있다.

변방의 지휘관(幕府)이 이곳에서 조선통신사를 맞이한 곳으로 생각된다.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이 일본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

는 명칭이다. 조선통신사는 전기에 5번 후기에 12번의 사절단이 일본에 갔다 왔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

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 역시 동인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1590년 3월 6일 출발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591년 음력 1월 28일 일본 교토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내놓게 된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

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이미 

명을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엇이 옳은 일이고,  또한 옳은 판단이고, 무엇이 나라을 위한 일이였는지 지금의 현 세태(世態)에서도

다시한번 생각해 하는 대목이다.......

  

 


조선 통신사  행렬도



자세히 보면 우리의 사신은  짚신에 버선을 신고 있으며, 일본인들은 맨발인점을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우리 통신사를 수행할 때 버선을 신는 것과 모자(갓)을 많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청수산성 뒷산에 많은 까마귀가 날고 있어 담아 봤다


 


고려문 옆 - 조선과 선린관계를 위해 노력한 일본인 우삼방주 선생 기념비
 

 

옛 대마도주의 거성(居城) 정문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대마도 도주 종무지공과 결혼하여 고되고 힘들었던 삶을 살았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덕혜옹주는 1912년생으로 고종과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의 소생으로, 일본은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면서 1925년 강제로 일본학습원에 끌려갔다. 1931년 대마도주 다케유키(종무지)와 결혼해 딸 마사에(정혜)를
 
낳았으나 조발성 치매증세가 1953년 이혼당하였다.


수선사-최익현선생의 순국지비가 있는 곳이다

 

 

 대한민국최익현선생의 순국지비

호는 면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185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흥선대원군으 정책을 비판하여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1898년에 경기도 관찰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사양하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여 다음해 6월 제자 임병찬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 체포되어 임병찬.유준근등과 함께 쓰시마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최익현은 임병찬 등의 권고도 듣지 않고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는냐, 너희나 살아 돌아가 나라를 구하라’하고 단식을 하여 운명하니, 시체가 본국으로 반환할 때 수많은 동포가 부산 포구에 나와 통곡하여 맞았다.
 


수선사내 공동묘지-우리의 묘지와 다른점을 볼 수 있다.

일본은 절과 집근처에 이렇게 돌로 묘지를 만들어 생활하는 걸 볼수가 있었으며 또 개인이 좋아하는 신을 모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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