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인디안 눈에 비친 세상

최우

무신2012. 3. 12. 10:06

 

최이(최우)-?~1249(고종36) 고려 고종 때의 權臣. 시호는 광렬(匡烈), 최충헌의 아들이다. 뒤에
 
이름을 우(崔瑀)로 고쳤다. 1219년(고종6) 추밀원부사(樞蜜院副使)일 당시 아버지 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집권하게 되니 처음에는 인심을 얻기에 힘써 아버지가 저축한 금 ․ 은 보화 등을 임

금께 바치고,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가가가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아

버지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혔던 관리를 유배 또는 파면하였다. 1221년(고종8) 진양후(晋陽

侯)에 봉해지자 이를 굳이 사양하였으나 뒤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 ․ 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 ․
 
판어사대사(判御使臺事)등을 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집정자(執政者)가 되었다. 이 무렵 최이는

몽고의 사신에 대하여 냉정히 대접하고는 북변에 여러 성을 쌓고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225년(고종12) 정방(政房)을 자기 집에 두고는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1227년에는 자기집

에 서방(書房)을 베풀어 문객(門客) 중의 명유(名儒)를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하는 한편 3번제(番

制)로 都房과 함께 숙위(宿衛)를 담당케 하고, 아버지 때의 도방을 外도방, 자기의 가병(家兵)을

內도방으로 하여 저택 내외의 경비를 임하게 했다. 1229년 이웃집 수백 호를 강제로 철거하여 격

구장(擊毬場)을 만들어 격구를 자려하였다. 1231년 최이의 처가 죽으매 왕은 채단(綵緞) 70필을

하사하여 왕후의 예로 장사케 했다. 당시 몽고병이 북변을 침범하더니 개성 부근까지 진출했다가
 
돌아갔는데 또다시 대군의 침범이 있으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왕께 강화천도를 청하고

는 녹전차(祿轉車) 100여대로 자기 가재를 강화에 옮기더니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케
 
했다. 1234년(고종21)에 강화천도의 공으로 진양후에 봉해지고 강화 연변에 성을 쌓고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1243년(고종30) 國學을 다시 진흥시키고 양현고(養賢庫)에 쌀(米) 300곡(斛)를
 
시납(施納)하는 등으로 장학에 힘을 쓰는 일방 강화에서의 대장경판 제조에 사재를 희사하여 후

에 완성케 했으나 차차 전횡(專橫)이 심해져서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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