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인디안 눈에 비친 세상

2016. 9. 29-30일 다산 정약용 선생 유배지인 전남 강진을 찾았다

서울 출발부터 비가 올 듯 구름이 끼어 있더니 강진에 도착하니 비가 온다.

강진 버스 터미널에 도착 우선 금강산도 식후경

점심부터 먹고 다산문화관, 다산초당, 백련사까지 걸어가면서 다도체험을 하기로 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김제평야의 들녁에 벼들이 익어가고 있다.

 

 

 

강진의 들녁도 역시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강진의 버스 터미널에 도착

 

 

터미널 옆 한정식당이다

 

 

한옥으로 잘도 지어 놓았다

 

 

 

 

한옥을 지나서 식당으로 가는 길에 노천 공연장이 보이고.....

 

 

노천공연장 앞에 먹거리 장터가 보이고 그 곳으로 들어가니 많은 식당들이 보인다

 

 

버스에서 내리니 강진군 관계자가 하는 말

강진은 한정식당이 많고 음식 맛도 좋다고 홍보를 한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회춘탕이다.

재료는 문어, 전복, 오리와 12가지 한약재가 들어가서 고소하고 힘을 솟게 한다고 말한다.

 

 

 

진한 국물이 울어나온 탕을 먹어본다.

 

 

역시 힘이 솟을 정도로 맛이 죽여준다.

 

 

여유~~ 이게 다가 아니네

생선 조림이 또 나오네....

 

 

 

점심을 먹고 다산 기념관에 도착하니 강진의 오감통 안내도가 보인다.

강진시장에서 10km 거리에 있다고 표기되어 있다.

 

 

 

정약용에 대한 기록은 책자, 인터넷을 통하여 많이 알려져 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은 포항 장기로

셋째형 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18년 1801-1818)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정약용은 생에 많은 책(500여권)을 저술하였으며 그 중 400여권의 책을

이곳 강진에서 저술하였다고 문화관광 해설사가 설명을 한다.

지금처럼 인쇄술이나 컴퓨터가 발달된 시대 같으면 혼자서 그 많은 책의 저술이 가능 했겠지만당시엔 붓으로 쓰고 재본을 하는 일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 때론 정약용이 읽어 내리면 그의 제자들과 강진의 향토학자들이 쓰고 다시 정서를 하여 책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향토학자들과 제자들이 토론하고 책을 저술했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되지만 받아 줄 사람이 없었다.

처음 읍중의 주막인 사의재(四宜齋)와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 및 아전 이학래의 집을 전전하였다. 1801년에야 겨우 다산초당에 안착하였다.

 

 

 

부모의 마음으로 의술을 베풀다

다산이 곡산부사 시절 마과회통(麻科會通)’63책을 저술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담아 홍역과 같은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정리한 것이다.

당시 역증(逆症)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으나, 의원들이 쉽게 구제하지 못하고 이를 회피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각종 치료법을 수집했다.

 

 

함봉련 사건을 재조사하여 무죄를 밝히다.

정조는 1799년 곡산부사로 재직하던 다산을 급히 불러 형조참의에 재수했다.

형조에 있을 때, 다산은 살인죄로 사형 판결을 받은 함봉련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무죄를 증명했다.

형사사건을 판결하려면 세가지 근거, 즉 유족 소고인의 진술, 검시결과, 공적인 증거가 합치되어야 한다고 하여 오래된 옥사를 명쾌하게 처리한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후일 흠흠신서저술의 바탕이 된다.

 

 

가학의 계승,  강진읍내 제자들,  다산초당 제자들,  불가의 학연들

 

 

 

 

다산문화관 관람을 마치고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 한옥들이 눈에 띈다.

 

 

 

 

 

 

입구에 큰 은행나무가 보이고 관광객들도 보인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 왼쪽에 대나무 밭이 보이고, 토사가 휩쓸려 나무 뿌리가 들어나 있다.

 

 

 

다산초당

 

 

 

문화관광 해설사가 다산초당과 다산이 생활한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산동암

 

 

 

전망좋은 곳이다.

다산동암을 지나니 정자가 보이고 들녁이 보이고 강진만이 보인다.

다산초당을 지나 만덕산 오솔길을 걸어 백련사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