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인디안 2013. 3. 1. 11:56

추사 김정희 유배지 탐방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篆刻) 또한 최고의 기술을 가져 천재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유배 거적지가 돌담으로 길게 쌓여 있다.

 

돌담을 돌아 유배생활 토담집으로 들어오니 넓은 정원이 보인다.

 

1821년 34세의 김정희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출셋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10여 년간 김정희와 부친 김노경은 각각 요직을 섭렵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지러운 정국과 정쟁의 파고 속에서 1830년 부친 김노경이 탄핵받는 일이 발생했다. 아들로서 김정희는 꽹과리를 치며 부친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에 절도안치(絶島安置,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하는 형벌)되었다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이들 부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838년 김노경이 세상을 떴고 김정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훈풍도 잠깐,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 세력들이 이번에는 김정희를 공격하여 그를 관직에서 끌어내렸다.

 

 

김정희는 혹독한 고문 끝에 제주도에서 서남쪽으로 80리나 떨어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위리안치(圍離安置)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현재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옛 대정현 현청에 이웃한 김정희의 적거지는 복원된 것으로 유허비와 함께 조그만 유물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특히 유배 기간 중 부인과 며느리 등과 주고받은 40통에 달하는 한글 편지는 그의 인간적 면모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배 기간 동안 화가이자 제자인 소치 허유(1809~1893)가 세 차례나 제주도로 건너가 수발을 들어준 일은 유명하다. 소치는 충심으로 스승인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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